/사전투표율 핑계로 투표용지 50%만 인쇄한 촌극 대구 7곳 포함 전국 67곳 긴급 송부… 22곳은 한때 투표 중단 선관위원장 사퇴 표명에도 정치권 ‘선거 무효’ 공방 격화
[대구제일미디어 = 김용남 기자]
지난 3일 치러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대한민국 헌정사에 ‘투표용지가 없어 유권자가 투표를 못 한 선거’라는 오점으로 기록되게 됐다. 선거 관리의 최고 책임 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수요 예측에 실패해 본투표 당일 전국 곳곳의 투표소에서 용지가 동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참정권이 국가 기관의 어처구니없는 탁상행정으로 인해 철저히 유린당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 ‘50% 감축 인쇄’ 지침이 부른 대참사
7일 본지가 선관위 공식 발표와 각 지역 선거관리위원회 대응 현황을 종합 분석한 결과, 이번 사태의 1차적 책임은 중앙선관위의 안일한 행정 편의주의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선관위는 높아진 사전투표율과 미사용 투표용지 폐기에 따른 예산 낭비를 막겠다며, 일선 구·시·군 선관위에 본투표 당일 투표용지를 선거인 수의 50~60% 수준만 인쇄하도록 지침을 하달했다. 심지어 극심한 혼란을 겪은 서울 송파구의 한 투표소는 전체 선거인 수의 49%에 불과한 용지만을 준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수십 년간 선거를 치러온 헌법 기관이 기본적인 투표 수요조차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채 ‘종이 아끼기’에 급급하다 대형 사고를 친 격이다.
◇ 대구 7곳 등 전국 50곳 아수라장… 투표 중단만 22곳
피해는 전국적이었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투표 당일 투표용지 부족으로 용지를 추가 긴급 송부받은 투표소는 전국 1만 4,288곳 중 총 67곳에 달했다. 서울이 35곳으로 가장 많았고, 대구 역시 7곳의 투표소에서 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해 현장에서 큰 혼란이 빚어졌다. 이 밖에도 부산(8곳), 경남(8곳), 인천(6곳) 등 영남권과 수도권을 가리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터졌다.
이 가운데 실제로 추가 송부된 용지를 사용해야 할 만큼 심각한 부족 사태를 겪은 곳은 전국 50곳으로 집계됐다. 특히 22개 투표소에서는 용지가 도착할 때까지 투표권 행사가 전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현장의 일선 공무원들은 당일 오후 2시경부터 선관위 내부 메신저를 통해 “용지가 바닥나고 있다”, “유권자 항의가 거세 경찰 지원이 필요하다”며 다급히 구조 요청을 보냈으나, 선관위 수뇌부의 늑장 대응으로 사태를 키웠다.
◇ 출구조사 발표 속 투표 강행… 오염된 공정성
더 뼈아픈 대목은 선거의 공정성 자체가 흔들렸다는 점이다. 용지 고갈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부 투표소는 마감 시간을 밤 10시까지 연장했다. 이로 인해 오후 6시 정각에 발표된 지상파 방송 3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스마트폰 등을 통해 퍼져나간 상태에서 투표가 진행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유권자가 선거 판세를 미리 인지한 상태에서 표를 던지는, 이른바 ‘자유·비밀 선거’의 대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국민의힘 측은 “출구조사가 유출된 상태에서 진행된 투표는 이미 공정성을 상실했다”며 투표 무효 및 재선거를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관위의 무능은 짚어야 하나, 선거 결과 자체를 뒤집으려는 정치 공세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사무총장은 즉각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선관위는 외부 인사 9명으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해 철저한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수습에 나섰다.
[기자수첩] 영혼 없는 관료주의가 낳은 참정권 참사
20년 넘게 취재 현장을 누비며 수많은 선거를 지켜봤지만, 국가가 투표소에 찾아온 국민에게 “투표용지가 없으니 기다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목도한 바가 없다. 이번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대란은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숫자만 맞추려 했던 관료들의 영혼 없는 기계적 행정이 빚어낸 참사다.
선관위원장 몇 사람의 사퇴로 덮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대구와 경북을 비롯해 전국에서 투표를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낸 유권자들의 분노는 여전히 끓어오르고 있다. 국회 차원의 매서운 국정조사는 물론이고, 투표용지 배부부터 현장 위기 대처에 이르기까지 선관위의 모든 시스템을 해체 수준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신뢰를 잃은 선거 기관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이다.

